지역이 다른 현존 공간의 병치-비보산수
작품명제 ‘봉천(奉天)가는 길’은 특정 동네이름이라기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 마을의 대명사다. 말하자면 산 밑에 있는 하늘에 가까운 동네는 모두 봉천이다. 이번 작업의 인왕산은 겸재나 강희안의 조망이 아닌 무악재, 홍제동, 홍은동 등 안산에서 조망한 것으로 여수, 홍천, 영덕 등을 병치(倂置)시켰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어 버린 공간에서 인간의 탐욕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인간의 고통을 바라본다. 그 곳에서 단순히 건축적인 아름다움이나 역사적인 풍경 이면의 부정과 결핍을 감지한다. 모든 장소는 인간처럼 스스로의 결핍을 지니고 있다. 그 장소를 움직여 해체시키고 상반된 풍경을 결합시키며 보완해가는 과정에서 나의 이상화된 꿈을 실현시키면서 대립과 갈등을 화해시키고 조화를 꿈꾼다. 일종의 비보산수인 셈이다.
고샅길의 천국
1968년 1.21사태이후 1993년까지 인왕산은 25년 동안 입산이 통제되었다. 그 시간에도 동네 주민인 조부께서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입산허가증을 발급받아 새벽에 오르곤 하셨다. 지금의 산길은 하도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돌도 잘게 부서지고 비탈길에서도 미끄럽지만 그때의 산행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기억이 된다. 모든 길은 고저장단(高低長短)이 연결되어 통해있다. 산도 그런 기세의 흐름을 타듯 오르고 내려 이웃하고 있는 집들을 이어주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또 옆으로 가는 길이, 트여있다.
옥인동 47번지의 나의 집은 8갈래의 길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골목길이 모세혈관처럼 촘촘하고 가늘게 연결되어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원형의 삶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울 다름이다. 개발이 오히려 장소성을 훼손하고 획일화를 시켜버리니 개발과 보존과 복원의 공존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과 6.25가 만든 길로 무수히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도 있다. 누하5거리를 통해 다녔을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할머니가 위에서 배웅하고 내가 다 내려오면 뒤돌아 손 흔들었던 고양이 뒷목길 (63계단길) 등 무수히 많은 길과 일상의 경험이 농축된 삶이 중첩되어 있다.

틈, 사이, 모퉁이. 구멍
모퉁이는 골목마다 있지만 정작 모퉁이를 만든 것은 그 골목에 붙여둔 나의 그리움이며, 모퉁이에 숨은 이는 남자지만 정작 모퉁이에 남자를 숨겨준 이는 여자다. 그 빈자리에 고일 곳이 없었다면 줄 끊어진 연이 나 뒹구는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것이다. 그저 넓은 것, 휑하니 뚫린 것, 쭉쭉 뻗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어 들어, 그것들에 숨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서촌 일대의 골목길 100경중에서 4점만 전시될 예정으로 나의 경험에 기반한 공간을 중심으로 앞으로도 연작으로 이어갈 것이다.
모시나 삼베 위에 그려진 건식프레스코와 자작나무 판넬 위에 그려진 습식프레스코가 연결되어 한 작품의 연작으로 이어지는<이중섭 생가> 작업과 흙벽지위에 무수히 많은 색층을 올린 후에 감각적으로 긁어내면서 조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달빛으로 달리는 기차>로 변화를 주고자 하였다.
무광택의 회벽이 다른 형상으로 환생하고 있는 자작나무와 설경은 오랫동안 나의 작업의 근간을 이어온 소재였다. 가지를 이어 붙인 연리지가 아닌 것으로 그 간격, 사이, 거리를 기본적인 생육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자작나무의 배경에는 인왕산의 병풍바위나, 범바위가 표현되어 화면전체의 숲이 마치 홍천에서 옮겨온 것으로 늘 보던 익숙함에 대한 결별에서 새로운 것과의 조우, 다른 영토에서 새로운 비젼을 만나기 위해 자기 존재를 던지는 것에서 그림여행길을 나서는 것이다.
가을과 겨울, 봄, 사이가 중첩된 절기에 맞물려 있는 간극에 도드라지는 운동성과 엿보이는 생명력이 미묘하게 겸허한 비움의 마음으로 인도한다. 간절기는 늘 나를 깨닫게 한다. 완연한 계절은 늘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피부로 느낀다. 사람들처럼………
시간의 지속에 따른 체험의 중첩으로 내 기억의 풍경을 통하여 그 특유의 공간이 발산하는 아우라, 진동, 여운을 감지해본다. 풍경이 아닌 직접 체험한 공간으로 현지인이 아니면 모르는 풍경, 직접 그 공간에 들어와 있는 모습으로 마치 보이는 사람만 보이는 풍경처럼 말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굳이 그곳에 가지 않아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가에 따라 가슴이 훗훗해지는 것은 거기서 태어나고 어렸을 때부터 체득된 결과의 산물일 것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산 아래서 살아 온 사람들의 보편적 심성이 나의 그림을 통해 공감되기를 바란다
인왕산 자락에 터전을 잡아주시고 산에 오르고 내림에 있어 <계곡을 타고 오르고 능선을 타고 내려와야 산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던 조부와 일년이 멀다 하고 청운동에서 누상동을 거쳐 옥인동까지 잦은 이사로 풍부한 경험의 폭을 넓혀주신 아버지의 선물이 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해와 같은 은덕을 베풀어 주심에 전시를 통해 기리고자 한다.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