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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새겨 넣는’ 그림의 도약!


1.
라틴어로 ‘종교’(re-ligio)는 ‘원시반본’(原始反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태가 혼탁해졌을 때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근본을 다시 생각하면서 현재로 되돌아와 스스로를 갱신하는 사유의 성찰적 운동 양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까운 과거와 인과관계로 묶여 있는 현재를 먼 과거와 연결해서 보면 현재의 꽉 짜인 시공간적 배치 속에도 숨 쉴 수 있는 빈틈이 새롭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틈이 있어야 생명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양태’로서의 종교와 ‘사회적 제도’로서의 종교의 차이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상품 사회 속에서 근대종교는 구원을 상품화하면서 전자의 면모를 상실한 지 오래인 듯하다. 오늘날 성찰적 사유를 종교에서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현실종교’는 절망의 제도화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전도가 단지 종교만의 문제일까? 예술 역시 이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예술에도 ‘사유 양태’로서의 예술과 ‘사회적 제도’로서의 예술이라는 두 차원이 구별될 수 있다. ‘궁정예술’로부터 해방되었던 근대예술은 자유로운 감성과 창조적 사유를 생명으로 삼았으나 지난 2세기에 걸쳐 상품사회 속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통해 애초의 생명력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이에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투자가치가 높은 ‘명품’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현실예술’은 최고가 브랜드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한때 생명과 성찰, 창조와 감수성의 동력이었던 종교와 예술이 딱딱하게 제도화된 “현대는 무너져 내리는 시대”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모든 가치들이 무너져 내려 굳어지고 상품화된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작가, 지식인, 사상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원시반본’적인 태도를 취해 보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성찰과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에 둔 창조적 사유를 향해 나아가기가 그것이다. 이런 태도를 찾기 위해서는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오늘의 종교와 예술의 제도적 틀을 버리고 시간과 공간의 “결을 거슬러” 먼 과거와 먼 곳으로 나아가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결을 거슬러” 먼 과거와 먼 곳으로 나아가는 여행에는 무엇 하나 손쉬운 것이 없을 것이다. 모든 이정표를 의심하고, 모든 기록들의 이면을 더듬어야 하며, 감각을 곤두세우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공할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회의하는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기질은 점점 성마르게 될 수 있다. 더구나 이 싸움은 “원시반본적”인 순환의 구조를 갖는 싸움이므로 끝이 보이지 않고, 현재에 몰두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는 더더욱 보이지 않기에 힘이 들 수밖에 없다.
화가 박강원이 취하고 있는 회화적 여정은 이런 의미로 고난에 찬 순례여행인 것처럼 보인다. 전시제목을 스스로 <마음의 여행>이라고 붙인 데서도 이런 취지가 드러나 보인다. 나는 지난 99년 전시 <마음의 여행>에 대해 “시간의 체취로 공간 읽기”라는 표제를 붙여본 적이 있다. 이후 그녀가 택한 회화적 여정의 시공간적 궤적은 더욱 멀고 넓게 퍼져 나가 이제는 구약의 발원지인 “요단강” 주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린 요단강 풍경의 중심에는 여호아나 원초적 자연의 경이로운 풍광 대신에 그녀의 어린 두 딸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다. 종교와 예술의 근원을 찾는 순례여행의 종착지가 두 딸들의 초상이라니, 어딘가 설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2.
그러나 종교와 예술의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본다는 “원시반본”의 태도란 사실상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보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우주 창조와 예술 창조라는 것도 결국은 생명의 탄생과 성장과 진화를 만들어내는 사태에 대한 경이로움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곧 그것이다. 현대는 모든 가치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이지만 문명의 가파른 붕괴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의 경이로움, 지금 이곳과는 가장 먼 시공간의 경계에 섰을 때 갑자기 그런 깨달음이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두 딸들을 통해 일종의 “계시”처럼 다가왔을까? 마치 원효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깨달음이란 결국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느낀다는 것은 늘상 접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아마도 산고를 겪은 후 자신의 몸으로부터 빠져나온 아이를 가슴에 품는 순간의 경험, 그러나 살면서 곧 잊고 마는 그런 실존적 경이의 순간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엄마들은 생명의 모체로서의 엄마와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엄마로 구별할 수 있고, 상품화된 현대사회는 표준화된 후자의 틀에 의해 전자를 말살시키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문명의 붕괴 속에서도 가장 뼈아픈 것은 바로 전자의 가치가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단강 가에 선 두 딸의 모습을 보면서 존재의 경이로움을 깨닫는다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가장 엄숙한 경계선상에서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생명이 황막한 풍경에서 솟아나는 섬광처럼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서 두 딸들은 그 자신이 하나의 생명이지만 또 다른 생명의 모체로서 황무지의 풍광에 빛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상품사회 속에서 제도화된 자식들로 ‘훈육’되어 조만간 고가의 브랜드를 좆는 기계인간으로 변모될 위험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들이 이 문명 붕괴의 시대를 가로질러 생명의 경이로움을 상실하거나 망각하지 않도록 할 묘안이 없을까?
19세기적 가치의 붕괴를 견디며 생명철학의 기반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종교적 감정이 사람을 들뜨게 한다면 미적 감정은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가라앉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건강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들뜬 감정은 쉽게 사라지거나 존재를 환상에 빠지게 하기 쉽다면 미적 형식으로 침전된 감정은 지속가능하며 존재를 실재적으로 풍요하게 양육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경이를 느끼기도 어렵지만 이런 경이로움을 미적 형식으로 스며들어 지속가능하게 만들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강원의 이번 전시가 세심한 주목을 끄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일종의 계시처럼 다가온 생명의 경이로움을 어떻게 화폭 위에 침전시킬 것인가? 종교적 계시-존재론적 경이의 체험-미적 침전의 트라이앵글 구축하기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이런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표현적 메카니즘을 경유해야 하는가?

3.
그녀의 최근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특징들. 점점 더 얇아지는 화면과 더 잘게 분화된 터치, 점점 더 사라지는 윤곽선과 점점 더 색면을 통해 스스로 솟아오르는 유동적인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점점 더 부드러워지면서도 미세한 직조를 통해 서서히 견고해지는 회화적 스타일이 하나의 열쇠를 제공하는 듯하다. 물론 이런 특징들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의 그림을 전반적으로 지배해 온 것들이기에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그림들에서는 그간 연속적으로 누적된 이런 경향들로부터 일종의 질적 도약 같은 기운이 떠돌고 있다. 마치 얇은 화석 속에 새겨진 오래된 나무의 무늬 같은 시간의 체취가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스며 나오도록 화면에 시간의 결들을 갈필의 작은 터치들로 겹겹이 ‘상감하기’; 이런 방법은 마치 아이를 잉태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지난하기도 한 생명의 양육과정과도 닮아 보인다. 이전의 그림들이 “시간의 체취로 공간 읽기”를 시도했다면 이제 그녀는 “시간의 체취로 화면에 생명을 새겨 넣으려고” 시도하는 듯하다.
물론 회화적 상감 기법이라고도 할 이런 시도가 아직 충분하게 모든 그림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몇몇 그림들에서 분명하게 이런 표현적 운동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고립된 사물들의 집합체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개개의 풀과 공기와 바람과 흙과 물들이 각기 서로의 경계를 확장하고 겹치는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광을 형성하듯 갈필의 작은 터치들이 미세하게 겹치면서 “자기-조직화하는 회화”를 형성해가는 이런 그림, 자기-조직하는 우주적 생명의 그물망의 일부로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스스로에게 새겨 넣는 이런 그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인류는 위대한 여자 화가가 탄생할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특정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또 그러하기에 생명의 경이로움을 회화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문제들은 결국 오늘과 같은 지구적 생태 위기를 자초하게 된 원인들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란 새로운 기회의 모체라고 볼 때 오늘과 같은 문명 붕괴의 시대야말로 위대한 여자 화가가 탄생하게 될 기회가 아닐까? 물론 “위대함”이란 용어 자체도 정복과 착취를 일삼아온 가부장 시대의 유산이기에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19세기 중반 최수운이 예견했던 ‘후천개벽’의 시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후천개벽’의 주체가 될 여성들의 자각과 깨달음이 지체되었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를 경유하면서 생태학과 페미니즘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 화두를 문화적이고 예술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바로 여자 화가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앞서 박강원의 이번 그림들에서는 종교적 계시-존재론적 경이의 체험-새로운 미학적 표현의 트라이앵글을 구축하는 것이 과제라고 언급했었다. 이때 종교적 계시라는 것의 의미는 ‘원시반본’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사유의 양태를 뜻하는 것이지 오늘날 개신교나 천주교나 불교와 같이 제도화된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생명의 잉태와 양육에 대한 존재론적 깨달음을 미학적으로 침전시켜 지속가능하게 하려는 그녀의 작업에서 생태학과 페미니즘이 결합되어 생명의 가치를 전면화할 ‘후천개벽’의 작은 단서를 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녀가 그림을 그려나가는 동안 이런 흐름의 기운을 더욱 깊게 성찰하게 되면 될수록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의 딸과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서 이웃들과 사회와 자연으로 확산될 것이다. 칸트가 미학의 교육적 기능이라고 생각했던, 즉 미적 체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연습이라고 생각했던 바를 실천해나가는 것이 바로 이런 길일 터이다. 한 송이 작은 꽃 속에서 큰 우주가 피어나듯, 그녀의 작은 그림들 속에서 큰 우주가 잉태되고 있는 듯하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학/문화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