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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화두풀기, 그 뜨거움과 차가움
‘다음 세상’에 대한 의문을 ‘지금 세상’에 묻다


馬祖 대사가 몸이 편찮았다.
한 승려가 물었다.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신지요?”
대사가 대답했다.
“해 부처, 달 부처.”
<벽암록>이라는 선어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몸의 상태를 물었는데 뜬금없이 해와 달을 거론했다. 왜일까? 어이없게도 어느 책에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차원 높은 선문답이라는 것만 칭송할 뿐이다.
이런 것을 화두(話頭)라고 한다. 풀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흔히 화두란 말을 쓴다. 불교에서의 화두란, 이런저런 번뇌 망상이 들끓는 것을 막기 위해 확실한 하나의 번뇌를 갖는 것이다. 번뇌로 번뇌를 이기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몸을 물었는데 해와 달을 답했다. 왜일까?’ 하고 이 문제만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다른 번뇌는 생기지 않는다. 간단하다.
괜히 거창해 보이지만 화두란 것도 별 것 아니다. 그러나 별것 아닌 그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화두를 들고 있는 동안은 정신이 짱짱하다가 화두를 놓치는 순간 지옥의 열 두 대문을 한 순간에 통과한다고 한다. 그것이 수행자들의 세계다.
작가는 어떤가? 작가에게도 화두가 있다. 작가정신, 문제의식, 작업의 테마 등이 작가의 몸에 들어찬 화두일 것이다.

배삼식의 화두는 “다음 세상은?” 이라는 짧은 물음으로 집약된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인류에게 그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영원하다. 그래서 원초적인 질문이고 숭고한 탐색의 대상이다. 작가가 이 보편적인 물음을 화두로 삼았다는 것은 별일이 아닐 것 같지만, 그 별일 아닌 일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배삼식의 영혼은 부단한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예술이라는 영역과 불교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넘나드는 수행을 통해 자신이 품고 있는 화두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예술도 종교도 궁극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작가적 고뇌와 수행자의 정진이 둘이 아니라는 확신 같은 것이 그이 혈맥에 녹아 있다. 그가 천착하여 보여 준 세계가 그랬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배삼식이 조각가로 걸어 온 길에는 다음 세상을 향해 던진 물음표가 수없이 널려 있다. 그것이 그가 품은 화두에 대한 뜨거움이란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화두를 미끼로 던진 낚시 바늘에 걸려든 것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선과 악의 실루엣을 더듬기도 하고 위쪽세상과 아래쪽세상의 교신을 시도하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에 잣대를 대기도 했지만 늘 빈손이었다.
원래 그런 것이다. 화두란 것은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잡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보려고 할수록 캄캄하다. 그렇다고 팽개칠 수 없는 것이 화두여서, 작가의 작업실은 밤이 오면 다시 불이 켜진다.
배삼식의 몸에 들어찬 화두는 지나칠 만큼 뜨겁다. 그래서 늘 빈손이지만 늘 새롭게 시작한다. 화두가 뜨거운 만큼 그는 차갑게 산다. 예술적 탐구란, 탐구에 몰입하는 것이지 그 대상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화두를 버리면 도를 이룰 수 없지만, 화두가 도는 아닌 것처럼.

배삼식이 화두풀기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조형으로 보여 주었던 살림살이를 회화로 보여준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붓을 잡아 왔고 그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왔던 터다. 하지만 조형의 길과 회화의 길은 엄연히 다르다. 그 다름에서 오는 충격을 감당하는데 10년 세월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화두가 여전히 뜨겁다는 것이고, 작가적 태도가 여전히 차갑다는 것이다.
그의 화두가 뜨거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세상에 대한 질문을 다음 세상을 향해 던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현장으로 던진다. 거기서 무한의 소통을 추구한다. 위쪽과 아래쪽의 소통, 왼쪽과 오른쪽의 소통, 음지와 양지의 소통 등 세상의 모든 대립적 개념에 통합의 길을 내는 것이 배삼식의 회화가 선택한 화두풀기 방식이다. 그의 회화는 앞과 뒤가 다 수행의 흔적이다. 그림판의 뒤에 수시로 메모해 둔 상념의 흔적들이 그의 정진을 대변한다. 지인들이 그림의 뒷면에 이름을 쓴 것은 마치 기와불사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자신과 화두, 화두와 작업, 작업과 주변사람들을 소통시키려 했던 것이다.
작가적 태도에 차가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역시 소통하기 때문이다. 이 이성적이고 염결한 차가움은 바로 자신과의 소통에서 기인한다. 그의 회화에는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우주의 근원을 표현한다는 오방색(五方色)의 강열함, 영혼의 쉼터를 형상화 한 것 같은 비행접시 형상, 우주적 지혜의 상징인 연꽃, 수 없는 경계를 의미하는 격자무늬의 선, 짙은 바탕색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들이 엇비슷한 형상으로 반복을 거듭하는 것도 매우 치밀하게 의도된 듯하다.
그는 3000컷의 그림을 추구한다고 했다. 삼천불을 모시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삼천불이란 무한함의 상징이다. 그의 그림이 3000컷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화두가 그만큼 뜨겁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뜨거움을 절제하여 108컷으로 세상과 통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의도인 듯하다.
그러한 의도가 쉽게 수긍되는 것은 작가가 작업에 임하는 동안 자신과의 소통이 원만했다는 의미다. 나아가 화두풀기의 과정이 굴곡지지 않고 엄숙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조만간 화두를 타파하고 깨달음의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출지도 모를 일이다. 제발 그렇게 되어 세상이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이제, 배삼식의 진면목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불교에서 ‘진면목(眞面目)’이란 말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참모습이란 뜻이다. 매우 근원적인 자아를 탐구하는 말인데, 작가의 진면목이라는 것도 그 작업의 뿌리가 근원적인 문제의식에 닿아 있을 때 드러난다.
배삼식은 수행자라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건 그 내용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규격화 된 수행의 길이 아니라 무한한 탐색과 추구를 통해 인간 세상의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려는 뜨거운 정신을 품고 세상의 모든 물상을 차가운 시선으로 간파하는 수행자. 그는 지금 “다음 세상은?”이라는 화두를 풀기위해 다음 세상을 지금의 세상과 소통시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진면목이다. 그의 작업에서 읽혀지는 回歸, 母性, 還生, 靈魂, 休息 등의 키워드들은 그 소통의 길을 장엄하는 경전이 아니겠는가?

임연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