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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일기를 쓰듯, 그렸다. 하루 일을 끝내고 잠들려고 하면 잠과 현실 사이 입면기 환각 작용이 살포시 상영되듯이 나에겐 어떤 '변용'의 시간이 도래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각이면 구체적 몸짓과 감각, 언어로 경험한 하루라는 '시간'이 물질성을 입거나 형상화되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시간의 변용체인 어떤 형체를 재빨리 스케치해 두고 잠들었다. 그것은 대개 하루 동안 나를 엄습했던 감정의 내용들인 좌절이나 불안, 분노, 공포의 기록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내 일기가 점점 쌓여 갈수록, 나는 폴 크뤼첸 Paul Crutzen이 말한 대로 우리의 지구가 신생대 제4기 충적세Holocene 이후 자연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는 인류세Anthopocene를 지난다고 주장한 견해를 나의 '일기적 형상'들로 감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형상들은 가시적인 것들과 비가시적인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 에이리언들 같았다. 나는 그 형상들에 이름을 붙여 주면서 나 또한 '이피세 LeeFicene"라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라는 괴물이 탄생하고 성장한 이후, 나는 지금 내 속에서 '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나의 캄브리아기를 지나가고 있다. 요즈음의 나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재미, 무수한 나와 나의 사이의 형상들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나는 나를 억압하고, 공포에 짓눌리게 하고, 분노케 하는 것이 나를 차별하는 시선들, 질시하는 제도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편견에 찬 문화적 토양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차츰 나는 그 낯선Unheimlich 것들이 어떤 패러독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낯설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낯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낯설다고 느낌으로써 그것을 멀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에게 그런 낯선 것이 본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오히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것들의 정체를 홀로 앉은 밤에 대면했다. 그것들은 일기 속에서 어떤 곤충이나 동물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상들과 비슷했는데 나는 그것을 나와 섞인 나의 외부, 혹은 나와 낯선 타자의 혼합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무릇 작가는 언어로 명명되지 않는 언어와 언어 사이, 형상과 형상 사이를 비추어 보는 존재, 그 사이에 숨어서 떨고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 보는 존재가 아닌가 라고 생각해왔는데, 가끔 그 존재를 대면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서 엄청나게 솟아오르고 있다. 감기에 걸려서 기침 홍수에 빠져 잠든 나에게서 곤충들이 쏟아져 나와 지구를 뒤덮는다. 나는 그 중의 한 마리를 들고 바라본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곤충들이 따로 날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의 엄청난 곤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그 곤충을 그림으로써 그 곤충이 내 안에 숨은 언어 이전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그 곤충에 색을 입히고 말을 건다. <감기 곤충>이라고 이름 붙인다. 나는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한 명의 이방인으로서의 나를 바라본다. 나는 밤 시간에 그것을 길어 올려 아침에 채색하는 일과를 진행한다. 그리고 점점 더 나에게서 낯선 나를 꺼내보거나 나와 이별한 나, 변용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나와 내 인형의 관계처럼 그것이 나와 가까워진다. 구별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핀란드의 온칼로(Onkalo)에는 깊은 산 동굴 속에 신이 밀봉되어 묻혀 있다. 21세기가 끝날 무렵 일천개의 구리통이 쌓이면 창고 전체가 밀봉될 예정이다. 구리통 속에 밀봉된 신은 핵 폐기물을 가득 품은 파괴의 신이다. 신의 밀봉을 푸는 후손이 있다면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후손이여! 제발 봉인을 풀지 말아다오.'라고 해야할지, 영원히 후손에게 비밀로 해야할지가 현재의 논쟁거리이다.
구리통 속이 인큐베이터 속인 양, 아니면 말구유인 양 잠들어 있는 신의 잠을 깨우지 마라. 그 앞에서 우리가 "열리지 마라, 열리지 마라 동굴 위를 닐 암스트롱처럼 뛰어다니며 발자국을 남기지 마라."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주문을 거꾸로 외우고 있다. 우리는 내 후손의 죽음으로 지금 문명(文明)을 즐감하고 있다. 아 제발 불을 꺼야겠다. 후손들의 죽음으로 켠 전등불들을 꺼야겠다..(<후손들의 멸종으로 켠 전기> 중에서)

나는 밀봉된 파괴의 신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재빨리 스케치한다. 그리고 글을 써보기도 한다.(나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 작품 제작 과정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부숴지지 않을 줄 알면서도 어떤 금기를 열려는 나의 욕망을 읽어낸다. 다음 날 나는 이것을 그림으로 완성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부상을 입은 내 욕망을 가시화한다. 내가 이 모습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수많은 조상들, 형상들, 물질들이 있었다. 자아의 흘러넘침이 목격되었다. 외부에서 나를 변혁시켜려고 달려오는 혁명과 나의 내부에서 폭발하는 혁명이 불붙었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욕망은 계속 치솟아 오른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에이리언 같은 자아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그것을 자아 아브젝션Self - abjection이라 부를 수 있겠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림으로써, 그것이 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 좋다. 나의 잠과 잠 밖에 있던 것들, 나의 내부와 외부에 있던 것들이 이리저리 연결되어 여러개의 기관이 됨으로써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이 된다. 색을 입히자 그것들이 생명의 호흡을 시작한다. 컨셉이 선행하기보다 제작 "과정" 속에서 작품의 컨셉이 바뀌는 그림이 되었다. 이미지가 나의 손 아래서 천천히 현실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것이 보인다. 기괴한 호흡을 한다. 맞붙은 것들의 호흡을 한다. 이것은 실물이다. 나는 나의 심연에서 끌어 올린 그것에 최후로 이름을 지어 준다. "후손들의 멸종으로 켠 전기"라는 제목. 오늘도 나는 하나의 일기를 썼다. 어둡고 바닥조차 없는 곳에서 하나의 존재를 이끌어내었다. 비록 기괴하게 생겼지만 선악도 미추도 참과 거짓도 벗어난 존재. 나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완전하게 다른 어떤 존재를 품에 안았다. 어린 시절 나의 인형처럼 슬프고 웃기게 생긴, 숨 쉬는 존재. 이것이 추상인가 구상인가 해파리 평론가들에게 묻고 싶은 존재. 안녕? 하고 인사를 나눴다.

작가글